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영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문단 편집) == 내용 == [[파일:영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2.jpg]]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만든 높이 8.6m의 부조상(浮彫像)으로, 당시 신라인들이 거대한 [[화강암]] 면을 통째로 우묵하게 파서 다듬으며 그 안에 불상을 새겼다. [[화강암]]은 조각의 재료로 쓰기엔 너무 가공하기 어려운 관계로 전 세계적으로 [[대리석]]제 공예품보다 수량이 훨씬 적은데,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 신라인들이 길도 제대로 나지 않은 산 속 깊이 들어가 거대한 화강암 절벽을 통째로 조각했다는 것은 당시 신라의 석재 공예술이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 하겠다. [[월출산]] 600 m 고지에 있는 큰 암벽에 [[황해|서해]] 쪽을 향하여 조각했다. 당시 신라인들이 이 불상을 새긴 이유를 두고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에 걸쳐 전남 영암 지역이 [[중국]]이나 [[인도]], [[동남아]] 등 남방으로 가는 해로의 시발지였다는 점에서 뱃길이 무사하기를 빌기 위해 새겼다는 설이 있다.[[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2410180&cid=51704&categoryId=51712|문화유산채널 : 하늘아래 첫 번째 불상 영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 혹은 통일신라 내 [[백제]] 유민들의 발원으로 새겨진 백제 계통의 것이라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이 불상이 [[통일신라]] 시대가 아닌, [[고려]] 초기에 만들어졌다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들은 마애좌상이 취한 항마촉지인이 석가모니불 고유의 수인이지만, 인간 관점에서 항마촉지인은 영원한 제압과 부동성(不動性)을 상징하고, 따라서 [[고려]] 개국 당시 서남해안 반대 세력을 제압한 이 지역 호족의 위상과 관련이 있었음을 암시한다고 여긴다.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는 크고 높은 육계(肉髻)를 표현했다. 약간 치켜 올라간 듯하면서 지그시 내리뜬 [[눈(신체)|눈]]과 오뚝한 콧날, 꽉 다문 [[입]] 등 [[얼굴]]은 박력 있는 표현이다.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길고 큰 편이며 짧은 목에 [[신라]] 특유의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또한 떡 벌어진 당당한 어깨와 풍만한 가슴은 이 불상의 위용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얇은 옷자락은 가슴과 왼팔에 음각선으로 표현되다가 무릎 아래까지 흘러내려 대좌를 덮었다. 다리는 결가부좌하였고 왼손은 배꼽 아래에 놓고 오른손으로 무릎을 감싸 [[항마촉지인]]을 취했다. 다만, 돌의 두께가 조금 모자랐는지 오른손의 표현이 조금 어색하다. [[광배]](光背)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따로 조각했는데, 그 안에 연꽃 무늬와 덩굴 무늬를 넣고 가장자리에는 불꽃 무늬를 새겼다. 한편 이 불상에서 200m 가량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언제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는 절터가 있는데 1995년에 이뤄진 학술조사때 불상 주변에서 '통화이십오년정미(統和二十五年丁未)'(1007년), '용암(龍嵒)', '암사(嵒寺)', '도솔(兜率)' 등이 쓰인 기와가 다수 발견되었고 《동국여지지》에 월출산 구정봉 아래 용암사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 이곳에 용암사(龍嵒寺)라는 절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조사 당시 용암사지에는 무너진 탑도 하나 있었는데 1996년에 복원하면서 보물 제1283호 '영암 월출산 용암사지 삼층석탑'에 지정하였다. 이밖에 절에서 다시 100m 가량 떨어진, 불상이 잘 보이는 높은 암반에 자연석을 활용한 또 하나의 삼층석탑이 있다. [[월출산]] 높은 곳에서 웅장하고 패기 찬 불상 모습을 잘 보여주므로 당대의 걸작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이에 1972년 3월 2일 국보로 지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